형효순

가을이 높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산과 들을 오색으로 물들이는 중이다. 밤나무에서 알밤 삼형제가 세상 구경을 하고 있다. 고구마밭두둑도 고구마 여기 숨어 있노라고 슬그머니 벌어지고 언덕배기에 누렁 호박도 여기 저기 큼직하게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루비보다 고운 팥도 진주를 닮은 메주콩도 토실하게 익어 가고 있겠다. 슬슬 가을걷이를 시작해야겠다.

이제는 내가 가꾸고 거둬들이는 것들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는다. 난폭한 멧돼지의 침략을 막고 살금살금 내려오는 노루와의 숨바꼭질을 하면서 잡초를 뽑아주고 지지대를 세워주는 과정을 즐긴다. 마음이 심난 할 때 밭에 나가 그들과 함께 하다 보면 치유가 된다. 그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정성을 들이는 것만큼 돌려주는 자연의 섭리가 고맙고 감사하다. 광안에 차곡차곡 갈무리된 오방색 곡식들을 바라볼 때면 내가 농부라는 사실이 더 없이 흡족하다. 벼 베기도 시작되었다. 쌀값 걱정에 마냥 풍년을 좋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추수하는 마음은 배부르다.

벼를 길가에 널어 말리지 않은지 수년이 지났다. 논에서 곧바로 화물차에 싣고 산물 수매를 하거나 건조장에서 말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볍씨는 널어 말려야 한다. 너무 건조 시키면 걸삼이 생기기 때문에 적당히 말린 뒤에 갈무리 한다. 어중간한 나이에 다른 대안이 없는 우리는 내년에 심을 볍씨를 숙명처럼 마련 한다. 설사 그 쌀이 천덕꾸러기가 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농사를 포기 할 수 없는 우리나라 대 다수 농촌의 현실일 것이다.

오전에 널어놓은 볍씨를 담았다. 집 앞인지라 손수레에 볍씨 네 가마를 올려놓고 남편이 끌면서 밀라고 했다. 그런데 남편의 어깨너머로 멍이 들것 같은 푸른 하늘에 흰 구름과 낮달까지 절묘하게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바람까지 살랑 불었다. 낮달에 걸린 토끼구름, 바람에 뛰는 노루구름, 세어보고 바라보느라 손수레 민다는 생각을 잊었다. 힘들게 가던 남편이 덜컹 수레를 세우고 돌아본다. 아차! 싶어 수레를 보니 바퀴에 바람까지 빠져 있다. 하늘의 구름이 죄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이쿠 여보! 바퀴에 구름 빠졌네! 그래서 안 나갔나 봐”

호들갑을 떠는 내게

“왜 낮달은 안 빠졌나? 얼른 밀어 집에 가서 구름 빵빵하게 넣게”

돌아선 남편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몇 십 년을 살도록 내 생각과 도무지 엇갈리기만 하던 이 남자가 오늘은 웬일이래. 나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같이 웃기 시작했다.

“후후후! 히히히!”

지나가던 옆집 어르신은 멋모르고

“허허허”
 

 

형효순
전북문인협회 회원, (사)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장 역임
행촌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재주넘기 삼십년’, ‘이래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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