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 Food & Justice 지니스테이블 대표

국가가 기념일을 지정할 만큼 농업은 우리 사회의 근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권에서나 농업은 나라의 주변부 일로, 농업인의 날은 단순한 기념일로 치부되어 이벤트성 행사만 난무하고 있다.


내가 농촌을 처음 가본 때는 1992년 여름, 대학 농활 때이다. 친척 중에 농촌에 사시는 분들이 한분도 안계셨기에 그 전에 내게 농촌은 ‘전원일기’,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라는 인기 드라마의 배경, 딱 그 정도였다.

내가 농활을 처음 갔던 곳은 강원도 양양군 입암리라는 곳이었는데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마을 아이들하고 놀이를 했다. 처음 했던 일은 감자밭에서 수확된 감자를 특, 대, 중, 소, 그리고 조림용 크기별로 분류해 담는 일이었다. 볕은 끝이 없이 내리쬐는 것 같고, 감자를 담는 일은 담아도 담아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손끝이 야무지거나, 부지런한 손놀림도 아니어서 내가 감자를 담는 것인지, 감자에 치이는 것인지, 일은 버겁기만 했다.

다음날은 허리 굽은 할머니와 함께 경사진 밭에 콩을 심는 일이었는데, ‘콩밭 메는 아낙네야 배적삼이 흠뻑 젖는다’라는 대중가요 노랫말이 왜 나왔는지 저절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땀은 줄줄 내리고 다리는 바들거렸다.

그 다음날은 하우스 안에 들어가 오이를 따는 일이었는데 어른들이 “아고, 하우스 안은 큰 일 난다. 이 일은 하지 말아라”하면서 손사래를 치셨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걱정마세요.” 우리는 호기롭게 들어갔지만 숨이 턱턱 막혀서 10분도 못 버티고 빠져나오고 말았다. 저녁에는 마을 아이들을 모아 놓고, 공부도 하고, 수영도 할 수 있을만한 계곡에서 물놀이도 했는데 뭘 해도 아이들이 까르르 까르르 웃고, 하나같이 어쩌면 그렇게 수영을 다 잘하던지, “저 좀 보세요. 언니” 하고 바위에 올라 빙그르 돌면서 물 속으로 뛰어들던 아이들을 보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그 때 털털 거리는 경운기도 처음 타보았고, 경운기 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것도, 호미를 손에 쥐어 본 것도, 여름이라도 긴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도, 모자를 쓰고 수건을 두르는 게 필요하다는 것도 모두 처음 알았다. 농활을 마칠 즈음의 저녁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둥그렇게 모여 서서 농민 분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 형제 울부짖던 날” 하고 춤을 추며 농민가를 불렀다. 벌써 27년 전 일이라 새참을 먹으라 먹으라 하시고, 상기된 얼굴로 농민가를 부르시던, 강원도까지 왔는데 바다는 한 번 가봐야지 하셨던 어른들, 우리 한마디 한마디에 웃어주던 아이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 때의 너른 감자밭과 콩밭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우리 가족이 2009년 장수로 내려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감자를 심고 거둘 때, 나는 27년 전 강원도 양양군 입암리의 농부님들과 지금의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콩과 팥, 녹두를 심고 거둘 때, 경사진 밭에 콩을 심던 할머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까르르 웃고 놀던 아이들처럼, 수로와 논밭을 뛰어다니고, 장대를 들고 밤이며 감을 딴다고 달려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 때의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세월은 흐르고, 도시는 수많은 변화의 물결에 휩싸이고 있어도, 땅을 일구고 땀을 흘려야 하는 농사의 본질과 청소년기에 올라갈수록 농촌 밖으로 나가고 싶어할지라도 자연을 벗 삼아 아이를 자라게 하는 농촌의 기능은 수십년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부터, 내 삶으로부터 배웠다.

11월 11일은 농업이 국민경제의 근간임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농업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우며,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된 농업인의 날이다. 법정기념일인 만큼 농업인의 날을 기려 정부와 여러 시군구는 농업인한마당과 같은 행사를 열고 있고, 한편으로는 쌀소비 촉진을 위해 가래떡 데이로 명명해 떡을 나누는 행사를 하곤 한다. 국가가 기념일을 지정할 만큼 농업은 우리 사회의 근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권에서나 농업은 나라의 주변부 일로, 농업인의 날은 단순한 기념일로 치부되어 이벤트성 행사만 난무하고 있다.

농민이 없다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다면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단순한 진리가 마음을 움직여 대학 1학년, 농활을 다녀온 이후, 나는 해마다 농업인의 날 즈음에 농민들이 서있는 광장으로 나가곤 했다. 농사로 먹고 살만한 사회, 농촌에 사는 게 행복한 세상, 농업의 중요성이 인식되는 세상, 우리 농민의 노고가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자며 쌀포대를 이고, 농민들은 광장에서 머리띠를 매고, 농민가를 불렀고 우리는 이걸 아스팔트 농사라고 불렀다. 그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11월 운명을 달리하신 농민 열사가 한 두 분이 아니다.

농업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운명을 달리하신 농민 열사를 기억하고 헌화하는 날, 농업이 우리 사회의 근간임을 되새기는 날, 정부와 농민들이 머리를 맞대어 농정의 근본을 바꾸기 위해 기울여온 사회적 노력을 발표하는 날, 농업인의 날이 이런 날이 되었을 때, 우리 국민들은 농업을 더 잘 이해하고, 농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11월 11일 농업인의 날이 그저 여러 기념일의 단 하루가 아니라 우리 사회 농정의 역량을 키워내고 성과를 확인하는, 농민과 국민의 축제 같은 그런 날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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