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으면 해야지…실패한다고 안하면 바꿀 수 있는 게 없어”

[한국농어민신문 이상길 논설위원]

의문이 있었다. 왜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는가?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세상은 왜 그대로인가. 촛불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는데도 성장과 경쟁의 패러다임은 계속되고, 농민들은 왜 여전히 소외되는가? 청와대는 물론 정부와 산하기관에 농민운동, 시민사회 운동 출신들이 들어갔는데도 왜 농정은 변하지 않는가.

아주 근본적인 화두를 놓고 고민하던 참에 SNS를 통해 천규석 선생의 근황에 대해 선생의 제자가 올린 소식을 접했다. “선생께서 성공하지 않으시고 부러, 끊임없이, 실패하는 삶을 사셨다”는 그 말이 나를 창녕 영산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럴수록 원칙을 지키는 어른의 말씀이 소중하지 않은가?

이 사회는 돈과 권력이 성공의 기준이 되는 사회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심지어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 산다는 것은 곧 출세 또는 치부와는 담을 쌓고 산다는 얘기다. 어지간한 이들은 권력을 추구하거나 권력에 들어가면 스스로 입장을 바꾸거나 그 권력에 포획된다. 그런데 세상에 원칙과 철학을 실천과 일치시키기 위해 부러 실패하는 삶을 택한 분이 있다니.

아는 이를 통해 언론과의 인터뷰를 달가워하지 않는 천규석 선생과 통화하고 어찌어찌 4월10일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돌아갈 때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윤리적 소비’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등 선생의 저서 일부를 구해 서둘러 읽었다.

자택 주변의 다소 복잡한 길에서 헤메다 도착하니 선생이 “나 같은 사람하고 인터뷰 할게 있나요?”하고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길 잃은 기자를 반긴다. 전보다 야위고, 허리도 불편하시단 말씀을 들었지만, 생각보다는 팔순 답지 않게 강건한 모습에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마주 앉은 회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선생은 ‘장일순’ ‘김지하’ ‘박재일’ ‘염무웅’ ‘김종철’ 같은 한국 현대사 인물들을 스스럼없이 거론했다. 또한 ‘마르크스’ ‘오웬’ ‘프루동’ 같은 사상가, ‘나로드니키’와 ‘브나로드’까지 세계의 근현대사 얘기를 곁들여 인류의 문제, 한국사회의 문제,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자신의 ‘소농두레’ 사상을 설명했다. 몇 몇 장면에서는 아주 격한 어조가 되기도 했지만, 이내 “옳으니까 가야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와 기자에게 다짐하기도 했다.

-2014년 ‘잃어버린 민중의 축제를 찾아서’ 발간 이후 근황이 궁금합니다. 공생농두레 농장은 이제 마무리 하셨지요?

“공생농두레 농장은 농사 훈련 교육장이었어요. 앉아 강의하는 교육이 아니고 실제로 부딪쳐서 농사를 배우라는 거예요. 대구 한살림 할 때 회원들의 모금으로 1995년에 8000평 땅을 사서 만들었지요. 사라진 두레를 오늘 현실에 맞게 복원하고자 15년 정도 운영했어요.

뜻이 같이하는 젊은이들이 계속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상당수가 농사일이 힘드니까 못 버티고 도로 돌아가요. 반대로 농사 좀 잘 하고 체질이 맞는 한 청년은 내가 붙들고 싶었는데, 그 친구는 여기 처녀랑 결혼한다고 몰래 야반도주 하듯 떠났어요. 미안하니까. 나중에 편지로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보냈더라고요. 그게 무슨 죄 지은건가요. 내가 뭐라고 하겠어요.”

천규석 선생은 요즘 허리가 좀 아프고 나이가 들어서 농사는 묵히고 있다고 한다. 힘든 농사 일을 접었다고는 해도, 팔순을 넘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아직 꼿꼿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자식들과 죽염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선생의 삶과 철학을 공유하는 이들이 자택에 모인다.

|일부러 실패한 삶 살아
한살림·두레농장 안했으면
경제적으론 훨씬 나았을 것
실패 알았지만 옳기에 도전
글 쓰며 스스로 족쇄 채운 셈


-일부러 실패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한살림이나 두레농장 이거 안했으면 경제적으론 훨씬 잘 살았겠죠. 내가 내 글 쓰고 그 글로 스스로 족쇄를 채웠어요. 안 그랬으면 일찍이 땅을 좋아한 내가 땅만 사 놓으면 저절로 부자가 됐을 겁니다. 호텔 짓는다고 거액을 준다 해도 농지는 농사를 짓는 땅이라고 파괴해선 안된다고 거절하곤 했어요.

공생농두레도 그래요. 그것은 반드시 성공한다고 한 건 아니거든요. 선례가 없거든요. 그렇지만, 그게 옳잖아요. 꼭 이전의 그것대로는 안했어요. 우리 현실에 맞춰 다르게 제시해 보자. 계속 뜻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어 이어나가면 그 때까지 하고 나는 그만두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도 그것을 안하면, 옳은데도 그걸 실패한다고 안하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해봐야 성공할 수 있어요.”

-공동체 운동은 실패한 운동이라고 비판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역사상 공동체 운동은 거의 다 실패했거든요. 나도 알거든. 바보 아니거든. 다 책도 봐서 알거든요. 한살림도 실패할 것이다. 한살림은 장사를 잘해 가지고 물량은 성공할 수도 있고, 하지만 이념은 나중에 퇴색할 것이다. 이렇게 봤어요. 로버트 오웬 같은 이들도 미국 인디애나에서 ‘뉴 하모니마을’ 공동체 3년 만에 실패했잖아요? 방적공장 큰 거 팔아가지고 어마어마한 재산 다 날렸죠. 이런 협동조합 운동은 그러나 이상사회로 가는데 필요한 수단이지, 목적인 이상사회가 아니라 했어요. 지금 매장 장사를 했던 로치데일이나 우리나라 생협이 협동조합의 표본처럼 돼 있는데, 푸르동이나 오웬 그런 사람들의 협동조합이 진짜입니다. 국가나 자본의 대안이 협동조합이지, 거기 예속된 것은 협동조합이 아닙니다. 오웬의 뉴 하모니마을은 실패했지만, 영국 전통의 장원공동체와 촌락자치공동체의 창조적 계승 복원이었습니다. 실패해도, 그래도 또 도전해야 돼요. 실패해도 옳은 거는 또 도전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생협은 원래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초기부터 지적했지만, 연합의 물류센터 같은 건 없애던 가 차라리 농민들이 해야 돼요. 매장 장사만 할 거면 협동조합이 아니라 주식회사와 같습니다. 새로 시작해야 해요. 그래서 제가 농장을 한 겁니다. 장사. 물건 파는 것만 매달리고 거기 전력투구하고, 말만 그럴싸하게 하죠. 돈벌이 가지고 계속 재산을 축적하거든요. 그건 누구 돈 입니까? 농민하고 소비자 조합원 돈으로 축적해가지고 땅 사고 연수원 만들고 그래요. 그 재산은 법적으로는 생협 거지만, 실제로 행사는 누가 합니까? 실무자가 하지, 무슨 조합원이 합니까. 죽을 때 내 줍니까? 그걸로 끝입니다.

|소농두레 운동이란
마을마다 두레답·공유답 복원
일할 사람 와서 농사 배우며
이웃과 함께 공동체 만드는 것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자 미래


-그렇군요. 그렇다면 선생님의 소농두레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시지요.

“나는 오웬 식으로 안하고, 오웬식은 완전히 사회주의거든요. 나는 두레농장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정책과 박정희 새마을 운동으로 사라지기 이전 까지 마을 두레답이, 공동답이 있었어요. 두레시절에는 마을에 개인소유는 2/3쯤 넘고, 1/3이나 1/5 쯤은 마을 공유답이 있었어요. 마을공동체를 운영하려면 경비가 필요할거 아녜요? 옛날에 땅은 다 사유가 아니라 다 공유였지만, 점점 사유가 늘었잖아요? 대부분 그리 됐지만, 두레시절까지만 해도 1/3 가까이가 공유가 있었다니까요.

일제 이전 조선말, 아니면 일제 초기의 두레를 나는 복원하고 싶은 거예요. 로버트 오웬은 완전히 공유지만, 우리는 자기 개인 소유도 있고, 공유도 있는 거죠. 일할 사람은 와서 농사일을 배워 가지고, 돈이 있으면 땅을 사고, 아니면 두레답이나, 또는 땅을 빌리던지 하면서 이웃과 공동체를 형성하는 겁니다.”

-1965년 당시 이농의 흐름과는 달리 대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오신 계기는 무엇입니까?

“내가 서라벌 예대를 나와서 서울대 미학과에 들어갔는데, 김지하가 미학과 동기, 박재일(한살림 창립)은 지리학과였어요. 또 한명은 6.3의 영웅이던 김중태라고.

김지하와 박재일은 당시 원주의 무위당 장일순 선생쪽으로 갔고, 나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 걸, 나는 내 고향 가서 나름대로 할란다고 그랬어요. 학교 다닐 당시 집에서 한 푼도 받은거 없이 나는 6년 동안을 머슴같이 입주과외를 하면서 심신이 피폐했어요.

대학 4학년이 되니까 날이 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농업중심 공동체. 내가 말하는 두레. 이것만이 인류가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사는 세상이다.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공산주의도 무슨 공장이 아니냐 이거예요. 인민공사 같은 집단농장인데, 그것도 우리가 말하는 전원이 아니라 공장이잖아요. 하지만 소농은 다 자기가 주인이잖아요. 소농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 그게 협동조합이거든요. 원래 협동조합 이념이 그겁니다. 작게 가진 사람들. 많이 가진 자들은 안합니다. 그러니까 소농들이 합쳐가지고 평등하게 민주세상 만들자는 겁니다. 인간의 본래의 모습으로. 그것만이 미래다, 교수고 뭐고 그것보다 가치 있는 게 농업이다. 그래서 내려온 겁니다.”

그는 지금도 그걸 견지하고 계시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그대로죠. 변함없죠. 아무리 뭐라고 그래도, 힘들고 해도, 실패해도, 그것만이 나는 인류의 희망이고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절대 오래 못 간다고 보죠. 반드시 총멸망이 오죠. 반드시.”

-총 멸망이 온다고요?

“두 가지로 이 문명의 종말이 옵니다. 잘 아시잖아요. 온난화 때문에 오고요. 온난화 피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가면. 이거는 예언이 아니고 과학이거든요? 그 다음이 자원, 떨어집니다. 아니, 석유 영원히 갑니까? 저게 아무리 많이 있어도 너무 깊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경제성이 있어야 되거든요. 남아 있어도. 2050년이 되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아무도 걱정 안하잖아요. 정치하는 사람은 안하거든요.”

-인류는 그걸 왜 해결하려 안할까요. 지금이 아니라 미래 일이라 그런가요? 이게 인류의 모순일까요?

“이상하죠. 그러니까 내 경험에 의하면 인류는 자기 혼자나 가족 먼저 죽는다고 하면 겁을 내는데, 다 같이 죽는다는 건 겁을 안내더라고요. 공멸은 신경 안써요. 인류의 모순이죠. 한계죠. 그러니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게 현명한 인간이 아니죠. 바보죠. 공멸이 더 무섭지. 그야 말로 다 죽잖아요.”

-농정 이야기를 좀 하지요. 문재인 정부가 농업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이 있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정부는 농업 문제는 아무 관심도 없고, 전혀 기대도 안합니다. 하고 싶은 얘기도 없어요. 예전에 누가 그러더라고요. 당시 총리를 지낸 정치인하고 대담 주고받는 모임에 갔는데, 왜 소농정책이나 이런 건 안하느냐 그러니까, ‘우리도 집권 안 했을 때는 그걸 얘기했는데, 권력을 잡아보니까 소농을 편들고 약자를 편들다가는 정권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고백을 하더라고요.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죠. 좌든 우든 그냥 타협하고. 그러니까 어떤 정권도 우리 요구 안 들어줬지마는, 내가 말하는 소농을 지키고 농업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지금 세대에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가장 해야 될 가장 최선의 길이고, 실패해도 지켜야 할 너무나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에, 탄핵당하고 정권 내놓을 각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대통령이 농민 기본소득 한다고 정권 유지 못하면 그건 역사에 남을 영광이지, 불행은 아닌 것 같은데? 대통령 5년 밖에 못하잖아요?”

|소농 살리는 건 우리의 의무
스마트팜은 공장, 농사 아냐
일자리 창출커녕 없애는 것
소농 지원해야 청년 돌아와
농민 기본소득 도입 바람직


-소농을 살리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요?

“그 방법은 내가 볼 때 직불제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보다는 녹색평론이 말하는 기본소득이 대안일겁니다. 다만 녹색평론은 기본소득을 다 하자는건데 그건 재원도 문제일 뿐만 아니라 다 해버리면 안하는 것 같아요.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농민 기본소득입니다. 조금만 주지 말고 1인당 100만원이라도 주면, 농사지을 수 있는 어른 부부 합쳐서 200만원이면 생존은 될 거 아닙니까. 그래도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주니까 농사를 지을 거 아니예요. 그러면 소농을 지킬 수 있다는 거죠. 일단. 젊은이들은 땅이 없으면 땅을 임대하고. 그렇게 먹고 살게 해줘야 농업을 살리지. 직불제는 농사짓는 땅이 있는 사람만 해당되는 거 아닙니까. 농업을 살리려면 젊은 사람이 들어와야 되는데, 지금 직불금 많이 받는 사람은 젊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나이 많은 사람이예요. 직불금은 땅이 넓어야 되거든요. 그럼 땅 없는 사람은 농사 못 짓죠. 안되죠.”

-유리온실에 이어 스마트팜, 4차산업 혁명이 정책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스마트팜은 소농두레와 전혀 배치됩니다. 그건 공장이지 농사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공장뿐 아니라 농사까지 4차 산업을 하고, 그럼 사람들 뭐 먹고 살란 얘깁니까. 일자리 창출 아니고 없애자는 얘기죠. 바로 지금 취직 못한다는 게 그 현상이거든요. 그거는 망하는 세상이거든요. 농업을 살리려면 대규모 시설에 줄 것을 소농에게 쪼개 줘야죠. 기본소득을 하면,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돈이 안 돼도 뜻이 있는 젊은이를 모아 농사짓게 하고 농업 살릴 수 있거든요.”

-이미 규모가 있는 기업농에게 몰아주는 지원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사유화 된 것을 뺏을 수 없으니 그건 놔두고, 공유는 국가 소유분 있잖아요. 그걸 마을 두레 단위에 주라는 거지. 지금 기업농이 하고 있는 걸 뺏거나 그러는 게 아니고, 그거는 지원 안 해주면 되는 거예요. 힘 쎈 기업농은 자기들이 수지 안 맞으면 안하면 됩니다. 세상에 큰 놈 천지고, 큰 거 바라면 세상이 망하는데, 작은 것을 지원해야지. 왜 큰 거를 지원해요. 큰 거는 안 망하고 세상을 빨리 망하게 합니다. 종말을 빨리 오게 합니다. 가능하면 규모가 작아야, 작은 단위로 살아야만 빨리 안 망합니다.”

-이 사회가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정권에 들어간 사람들이나, 시민사회나 농민단체나 모두요.

“시민운동도 잘 나가면 다 정치권으로 권력화 돼 버리고. 자신이 권력이 돼 버리고 그러잖아요? 농민운동도 해보니 다 그렇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두레정신, 자급정신, 자치정신>이 없어요. 가공도, 판로도 우리가 해야 주인이 되는 겁니다. 가공도 판로도 다른데 넘기면 농민은 항상 가난할 수밖에 없고 착취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6차산업이든 뭐든 농민이 해야 돼요. 크게 말고 작게요. 개인이 하든 법인이 하든 소농두레가 나눠서 다해야 돼요. 두레가 도시와 교섭해야 돼요.

정권이나 기웃거리고, 권력 쫓는 사람이 무슨 농업을 살려요? 같이 살다가 죽을 각오로 해야 살리지. 안 그러면 젊은 사람 어떻게 불러들이겠어요? 운동이 힘들고 괴로워도 하겠다는 정신을 가지고 운동해야죠.”


"농사를 시장에 맡겨두고 가는 진보, 개혁은 가짜"

천규석 선생은 4.19부터 6.3까지의 격렬했던 학생데모의 시절에 대학을 다녔고, 졸업 뒤에는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하는 ‘생활농민운동’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의 이론과 사상은 연구실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평생 농사일 속에서 스스로 공부하며 몸으로 깨우친 것이다. 그리고 그 깨우침과 행동이 서로 다르지 않게 살았다. 특히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가짜 진보를 비판하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 내지 진보세력이 체제에 편승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자경소농의 두레농사만큼 자립적· 자치적· 민주적이면서도 많은 일자리를 보장해 주는 삶의 방식은 없다”면서 “그런 농사를 시장의 손에 맡겨두고 가는 진보나 개혁, 그리고 민주주의는 보나마나 전부 가짜 민주주의다. 소농민과 그들의 농사를 외면하고 가는 진보는 아마 십리도 못가 발병날 것”이라고 했다.(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리도 못 가 발병 난다, 2006년 실천문학사)

이상길 기자

천규석 선생은 1938년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태어났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 한참 이농이 시작되던 1965년 그는 거꾸로 고향인 영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소농두레’ 운동을 제창하고 실천해 왔다. 1990년엔 도농직거래를 통한 지역 자치 자립 두레를 부활시키기 위해 대구 한살림을 만들었고, 1995년부터 창녕 남지에 귀농청년들과 소농두레를 실천하는 ‘공생농두레’ 농장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2대 공동의장을 지냈다.

저서: <이 땅덩이와 밥상> <땅사랑 당신사랑>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쌀과 민주주의> ,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 리도 못 가 발병 난다> <윤리적 소비> <잃어버린 민중의 축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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