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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해 열사 희생 헛되지 않게…농민 행복한 세상 만들자”

  • 기사승인 2019.09.11 16:38
  • 신문 3137호(2019.09.1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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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어민신문 이병성 기자]

▲ 추모식에 참석한 농민들이 이경해 열사 묘역에서 참배하고 있다.
▲ 추모식을 기념해 열린 도농 어울림 걷기대회에서 기념품으로 장수사과를 나눠주고 있다.

이경해 열사 16주기 추모식 
묘역 참배·추모 걷기 이어져


이경해 열사가 ‘몸은 먼저 가지만 정신은 지켜볼 것이다’란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농민의 곁을 떠났던 2003년 9월 11일. 그로부터 꼭 16년이 흐른 2019년 9월 11일 전국 각지의 한농연 회원과 농업인, 기관단체 관계자 등 300여명이 이경해 열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이경해 열사가 영면에 든 전북 장수에 모였다. 이번 추모식은 농업인들의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기점이자, 우리 농업의 회생을 위한 전환점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주최)와 한농연전북도연합회·한농연장수군연합회는 9월 11일 한국농업연수원(전북 장수)에서 ‘농민운동가 이경해 열사 16주기 추모식’을 가졌다. 이날 추모식에는 한농연중앙연합회 전·현직 임원과 회원을 비롯해 김인식 한국농어촌공사 사장, 장영수 장수군수, 강용구 전북도의회 농산업경제위원장, 김종문 장수군의회 의장과 군의회 의원들, 이명자 한여농중앙연합회장과 임원, 고승현 장수군농민회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추모식과 함께 ‘이경해 열사 묘역 참배 및 추모걷기’도 이어졌다.   

유가족 대표로 이경해 열사의 둘째 딸인 이고은 씨는 생전 이경해열사가 일기장에 남긴 ‘평생 농업을 위해 농민을 위해 살다 가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살다가는 것도 보람인 것 같다’고 적힌 문구를 읽으며, “아빠는 자식을 돌보듯 농업인들 한분한분 마음에 담아가셨다. 아빠를 떠올리면서, 태풍으로 힘들지만 우리가 함께 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며 추모식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경해 열사에 대한 추모사에서 김제열 한농연중앙연합회 수석부회장은 “일찍이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했고, 농업의 경제적 가치는 200조 원에 달하기에, 농업은 절대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고, “16주기 추모식이 우리 농업의 회생을 위한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 ‘몸은 먼저 가지만 정신은 지켜볼 것이다’란 열사의 유언을 되새기며 고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대한민국 농업에 새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한다”고 외쳤다. 

성태근 한농연전라북도연합회장도 “반평생을 농업과 농촌, 농민을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열사의 숭고한 뜻을 깊이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며 “오늘을 기점으로 우리 농업경영인들이 더욱더 힘을 합해 농업인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독려했다. 

장영수 장수군수는 “이경해 열사는 2001년 일본 총리관저 부근에서 당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사과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는데, 일본이 무역전쟁을 일으킨 요즘 이경해 열사가 다시 생각난다”며 “그는 농민운동가이자 민족운동가였다”고 회상했다. 

김종문 장수군의회 의장은 “평생을 농민운동에 몸 바치신 이경해 열사의 타향만리 칸쿤에서의 외침은 영원히 우리의 삶과 함께 하고 있다”며 “경사진 땅을 일궈 푸른 언덕을 만들었듯이 참된 희생으로 농촌을 살려보겠다는 이경해 열사의 정신을 우리 가슴속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성·조영규 기자 leebs@agrinet.co.kr


●이경해 열사가 걸어온 길

농민 권익향상에 온 힘
신자유주의에 극렬히 저항
‘WTO kills farmers’
향년 56세 칸쿤서 산화


이경해 열사는 1974년 서울 농업대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송아지 2마리와 함께 전북 장수에 서울농장을 세웠다. 1947년 8월 7일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향 전남 영암을 떠나 5살 때 첫 발을 디뎠던 장수에 자신의 농장을 만들었다. 1978년, 서울농장이 전북 새마을 청소년 훈련농장으로 지정되면서 훈련생 200여명을 배출, 1988년 제3회 FAO(유엔식량농업기구)로부터 아시아 태평양지역 ‘올해의 농부상’(농촌후계자 지도육성분야)을 수상하는 등 후계농 양성에 앞장섰다.

평탄하게 영농활동을 꾸려오던 중, 1980년대 초반 복지농촌시범사업 조성 정책 일환으로 수입소를 무리하게 농가에 분양하면서 농민들이 빚더미를 안게 된 ‘소파동’이있었고, 이경해 열사에게 ‘농민운동’이란 불씨를 던졌다. 이경해 열사도 농민들과 같은 피해를 입었고, 이 때 ‘농민들을 조직해서 함께 싸우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1983년 전국 최초 장수군농민후계자연합회장과 1987년 전북농어민후계자협회장을 거쳐 1989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의 전신인 한국농어민후계자협회 2대 회장을 역임했다. 장수군에서 전북으로, 또 전국으로, 보폭을 넓혀온 이경해 열사. 1989년에 협동조합의 민주화를 위한 ‘농·수·축협의 조합장 직접 선출에 관한 결의서’를 발표했고, 1990년에는 70일간 서명운동을 통해 ‘배합사료 부가영세율 적용’을 이끌어냈으며, 2001년엔 26일간 단식농성 끝에 체육청소년부로 탈법 이관된 한국마사회를 다시 농림부로 환원시켰던 일들, 그가 농민 권익향상을 위해 힘써온 결과의 일부다. 

이경해 열사는 1990년을 전후해 나타난 ‘신자유주의’에 극렬히 저항했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농산물 수입개방은 우리나라 농업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가 1990년 11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있던 스위스 제네바의 GATT 본부 앞에서 ‘WTO kills farmers’(WTO가 농민을 죽인다)를 외치며 할복을 시도한 이유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온 몸으로 투쟁해 온 이경해 열사의 ‘WTO kills farmers’ 외침은 2003년 9월 11일이 마지막이었다. 제5차 WTO 각료회의가 열렸던 멕시코 칸쿤에서 이경해 열사는 2m50㎝의 저지장벽 위에서 ‘WTO kills farmers’(WTO가 농민을 죽인다)를 외치다 자결했다.

“나는 염려마라, 열심히 투쟁하라”를 마지막 유언으로, 이경해 열사는 멕시코 칸쿤에서 농민들의 곁을 떠났다. ‘몸은 먼저가지만 정신은 남아 지켜볼 것이다. 나는 작은 성냥골이 될 것이다’라는 유서도 남겼다. 향년 56세였다. 
 

#이경해 열사 약력 
1974년 서울농장 설립(장수읍)
1982년 농업계학부출신 100명 영농후계자 선정
1987년 전북농어민후계자협의회 회장
1988년 FAO ‘올해의 농부상’ 수상
1989년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 회장
1990년 한국농어민신문 초대회장
1991년 전라북도 도의원
1992년 민주당 제14대 대통령선거대책 중앙위원
1995년 전라북도의회 산업위원장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농어촌특별위원회 부위원장
2000년 전북농민단체협의회 고문
2001년 스위스 제네바 WTO본부 앞 1인 단식농성
2003년 9월 11일 제5차 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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