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이병성 기자]

▲ 태풍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전남 지역 RPC 벼 매입현장에서는 수확의 기쁨보다는 근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영암군농협통합RPC 최대후 대표(왼쪽)와 임재근 검사관이 벼 품질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 

농가 얼굴엔 근심 가득
적막감 마저 감돌아
20여명 출하 농가 중
1등급은 6명 그쳐

외관 좋아 보여도 품질 나빠
쓰러진 벼 저가 유통 우려


“30년 넘게 벼 매입현장에서 품질 평가를 했는데 올해가 최악인 것 같습니다.”

링링, 타파, 미탁 등 벼 수확기 연이은 태풍으로 벼 재배농가들이 심정도 무거워지고 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야 할 가을들녘은 침수와 쓰러진 벼로 얼룩져 농민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남부지방의 10월 중순은 벼 수확과 RPC 벼 매입으로 가장 바쁜 시기이지만 전남 영암군농협통합RPC의 건조저장시설(삼호DSC)은 예년과 다른 모습이다. 농민들이 1톤 화물트럭에 수확한 벼를 싣고 간간히 들어올 뿐 수확의 기쁨은 실종돼 있었다.

최대후 영암군농협통합RPC 대표는 “예년 같으면 10월 중순경이면 연중 가장 바쁜 시기이고 원료곡 벼 매입량의 50% 이상을 끝냈을 것”이라며 “그러나 올해 1만8000톤 매입 계획 중에서 고작 500톤 정도 들어온 상태로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도미노처럼 이어지고 있다”고 말문을 꺼낸다. 이어 “평년 같으면 원료곡을 받는 DSC에 반입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상황이지만 올해는 적막감이 돌 정도이고 태풍 피해를 당한 농가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며 일선 농가들의 상황을 전한다.

태풍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반입되는 벼 등급 판정이 입증했다. RPC에 원료곡을 투입하기 전에 등급을 판정하는데, 올해는 2등급 이하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영암통합RPC 삼호DSC에서 벼 등급을 판정하는 임재근 농산물품질평가원 검사관은 “벼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 걱정이 앞설 정도로 올해 벼 등급이 매우 좋지 않다”며 “예년과 달리 2~3등급 건수가 많고 심지어 반입하지 못하는 등외 등급도 간혹 나온다”고 현장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30년 동안 등급평가 업무를 해왔는데 올해처럼 검사가 힘들고 무거운 마음이 든 해가 없었다”고 말한다.

등급판정 현황 기록표를 확인해 봤다. 13일자 기록을 보니 이날 하루 20여명의 농가가 벼를 삼호DSC에 출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등급은 고작 6명에 불과했다. 많은 농가들이 2등급이었고, 심지어 3등급과 등외 기록도 있었다.

임재근 검사관은 “평년 같으면 1등급 비율이 90% 이상인데 영암지역의 피해가 그만큼 심각한 상황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며 “외관이 멀쩡한 원료곡 벼도 실제 검사하면 등급이 낮게 나온다”고 설명했다. 벼 등급은 검사용 시료벼 50g의 왕겨를 탈피한 후 수발아, 심복백, 액미 등 피해립을 제외한 정상립 무게를 측정하는 간이검사 방식으로 진행한다.

벼 매입상황을 점검하고 있던 최대후 대표는 태풍 피해벼 대책에 대한 조속한 대책 시행을 강조한다. 그는 “쓰러진 벼가 시중에 저가로 유통될 경우 산지 쌀값을 하락시키는 악영향을 미친다”며 “원료곡 벼 외관이 멀쩡해 보여도 피해벼의 쌀 품질은 떨어져 이를 싼값에 매입한 일부 양곡업자들이 저가 유통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농식품부가 피해벼 수매 후속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 농가들이 시중에 낮은 가격에 처분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현장 상황을 전했다.

이처럼 올해 가장 많은 태풍 피해로 절박한 상황에 처한 남부지방보다는 경기도 지역의 경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올해 3만2000톤 매입계획을 세운 박일영 여주시농협통합RPC 대표는 “올해 진상 품종의 벼 매입가격은 지난해보다 높은 7만6000원을 책정했다”며 “지난해 경영실적이 호전돼 비교적 순조롭게 매입가격을 확정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주지역은 모두 조생종을 재배하기 때문에 태풍 피해가 덜 했다”며 “수확량과 품질은 평년과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여주시통합RPC 막바지 출하에 벼를 가져온 박찬갑 농가는 쌀 농사보다는 부재지주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부재지주가 문제로 늘 거론되고 있지만 정부가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어 최근 노골적으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박찬갑 농가는 “도시에 거주하는 부재지주들이 직불금을 수령하는 것은 부지기수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임대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게 현실 아니냐”며 “부재지주로 드러날까 봐 직불금을 신청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직불금 개편에 대해 “쌀 변동직불금이 있을 때는 벼값이 떨어져도 어느 정도 소득이 보전되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됐다”며 “벼농사가 투기농사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PC 경영에서도 안정적인 쌀값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박일영 대표는 “RPC 경영실적은 쌀 값 변동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정상적인 계절진폭 구조가 절실하다”며 “RPC 경영성과는 올해와 같이 매입가격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농가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한다.

이병성 기자 leebs@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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