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이진천 강원도 신농정기획단 연구원

농민은 전체 인구의 4% 남짓이지만 
‘농업농촌의 가치’는 너무도 위대해
새로운 국회는 숫자 너머 바라보길


농민들에게 해마다 4월에서 6월로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무게는 남다르다. 농사일로 바쁜 들녘의 먼 가을을 향한 땀방울의 무게는 천근이다. 투자 혹은 모험을 수반하는 농사의 불안한 무게는 만근이다. 힘겨운 무게들이다.

60년 4월 혁명,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87년 6월 민주항쟁. 4월에서 6월은 역사가 오래 기억해야할 사건으로 가득하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크게 굽이쳤던 시절이기에, 365일 중 다른 날들과는 다른 의미의 무게를 지닌다. 실로 민주주의의 계절이라고 부를만하다.

21대 국회가 개원하는 즈음에, 민주주의를 잠시 생각해 본다. 얼마 전 선거도 그러했지만,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리에 근거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절대 원리일 수 없고, 최종 합의를 위한 잠정적 원리에 불과하다. 다수결과 민주주의가 반드시 정합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반드시 머릿수가 많은 쪽이 주도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서울 강남3구에 사람이 살아봐야 얼마나 사는가? 그런데 그들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시스템을 사실상 쥐고 흔든다. 다수결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4월에서 6월로 넘어가는 처절한 민주주의의 역사가 입증한다. 우리가 건너왔던 민주주의는 머릿수가 아니라 마땅함[義]의 문제였다. 그 의로운 길에서 민주주의는 눈부시게 빛났다. 이 역시 다수결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잠시 통계표를 살펴보자. 4월 혁명의 1960년, 대한민국 2,500만 중에 농가인구는 1420만이었으니 57%에 달했다. 5월 광주의 1980년에는 3810만 중 1,080만으로 28%였다. 그로부터 또 20년이 지난 2000년에는 국민 4280만 중에 농가인구는 660만이니 15% 정도는 유지했다. 마침내 2020년에는 5170만 중에 220만 4% 남짓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머릿수가 100% 늘어난 60년 동안, 농가인구 또는 농민들의 숫자는 85%가 줄었다. 

우리는 대체로 다수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는 양상을 통틀어 민주주의라고 인식한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대체로 다수는 우월의식에 소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민주주의의 심리적 부작용인 셈이다. 바로 이 그늘에서 농민들은 고심하고 농촌은 더욱 공허해진다. 농민들의 한숨거리는 수백 가지가 넘지만, 이 계절에는 내심 이런 질문을 던지며 한숨을 쉰다. “4%에 불과한 농민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릴 턱이 있겠나!”

심각한 정치적 고립감이고 피해의식이다. 이 좌절감은 “다음 세대에 우리 마을은 사라질지도 몰라!” 하는 직관에 다다르면 더더욱 증폭된다. 수천 년을 쌓아온 농탑(農塔)이 속절없이 무너질 것만 같다. 농사가 신명날 턱이 없다. 어째서 눈부신 민주주의와는 전혀 별개로, 농민은 위축되고 주저앉아야만 하는 것인가? 지금은 소수라서 그렇다면 예전 다수일 때는 좀 달랐던가?

농민은 소수의 유권자일 뿐이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현실정치를 움직이지 못한다. 여의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읍내에서조차 소상공인들에게 밀리는 형국 아닌가. 가뜩이나 소수라서 발언권도 입지도 없는데 역동성마저 없다. 나이 든 농민이 온 몸으로 담지하고 있는 농(農)의 가치는 너무도 위대한 근본 가치임이 분명하지만, 이에 공감하는 눈 밝은 사람은 별로 없다.

6월로 접어들고 있다. 민주주의 혹은 정치가 리셋되는 느낌이다. 새로운 국회가 어떤 모습을 보일는지 모르지만 무턱대고 기대를 걸어본다. 그리고 대통령과 수많은 지자체장은 임기가 2년 남짓 남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조금은 다르게 심기일전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도 마저 기대를 걸어본다.

하지만 그 기대에는 조건이 있다. 새롭게 출발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는 머릿수나 숫자의 너머를 바라보기를 바란다. 특히 농업농촌을 바라보는 시각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겨우 200만 농민이라는 머릿수, 전자회사 하나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농업총부가가치. 그런 숫자 너머의 것들은 저절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정치가 마땅함[義] 즉 의로움을 추구할 때에만 겨우 보일락 말락 할 것인데, 그게 가능할까?

소수라서 소외되는 민주주의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농정 협치를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딱딱하게 굳어진 농정 적폐를 부드럽게 풀기 위해서는, 민간의 역량과 역동성을 처방해야 한다. 농지문제를 개혁해 경제정의를 지켜내야 하고, 농민기본소득으로 최후의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단 한사람의 청년이라도 마을에 머물 수 있도록 온갖 공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일들도 가능할까?

농업농촌의 공익적·다원적 가치와 기능으로 불리는 의제들은 아직도 귀에 낯설다. 이런 마땅한 의제들을 민주주의는 돌아보지 않았고, 지금까지의 정치는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참으로 야속하게도, 농업농촌이 마땅히 갔어야만 하는 길을 비추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정치가 새롭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면, 모든 국민들을 위해 농(農)의 길을 끈질기게 묻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정말 가능할까?

다수의 민주주의와 강자의 경제를 탓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다수의 힘에 취한 양아치 민주주의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국민 모두가 주인으로서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작고 낮은 소수들의 농(農)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농(農)의 회생과 적정선을 유지하는 노력을 통해 민주주의가 더욱 의로워지기를 바란다. 품격 있는 민주주의와 정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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