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민관 대등한  관계구축 움직임 꿈틀
중간지원조직 주민활동 조력자 돼야
‘낮은 풀뿌리 운동’ 구체적 전략 모색할 때

지방 분권과 자치, 크고 오래된 숙제다. 농정 영역에서도, 근년 들어 지방의 자율성을 높이자는 지방분권의 취지에 따라 농정을 추진할 수 있게 관련 제도나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와 실천이 힘을 얻고 있다. 그 같은 ‘농정의 지방분권화’는 여러 가지 변화를 전제로 한다. 가령, 중앙정부의 농정 예산을 지방자치단체에 이양하는 이른바 ‘재정분권’, 농촌 지역에서 추진되는 정책사업의 기획 또는 계획 기능의 실질적 활성화, 지방농정 의제(議題)를 형성하고 정책사업의 계획·실행·평가에 주민이나 농민이 능동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민관협력 구조의 제도화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농업·농촌 정책은 지역 상황의 다양성을 외면하기 어렵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농정은 중앙집권적 체계하에서 추진되어 한계를 맞이했다는 비판이 있다. 중앙정부가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고, 농정의 모든 분야에 관해 앞장서서 정책 사업을 마련하고, 개별 정책 사업마다 사업시행지침을 세세히 설계하고 시행하는 등 의사결정을 거의 독점하는 구조에서는 복잡다양한 농정 현장의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지방분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지방분권은 창의성, 다양성, 자율성, 책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전략이라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적 기대에 비례해 도전해야 할 과제도 무겁게 다가온다. 재정분권이 지방분권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농정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할 재량이 지방자치단체에 더 많이 부여된다고 해서 지방분권이 자동적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지방농정의 현장에서 계획은 물론이고 실행과 평가 과정 모두에서 농민과 주민이 능동적으로 그리고 관(官)과 대등한 위치에서 참여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지방 농정의 민관협력 구조 형성이라는 목표가 중요해진다.

요즘 농촌 여러 곳에서 ‘읍·면 주민자치회’ 전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대체로 인구 수천 명에 불과한 농촌의 면(面) 지역에도 형식상 주민자치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지만, 그 위원회가 실제적인 의미의 ‘주민자치’를 구현하는지 의문이 제기된 지 오래다. 그래서 ‘주민자치위원회’ 간판 아래 주민자치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취미교양 프로그램 따위를 천년만년 계속할 게 아니라, 모든 주민이 회원이 되는 주민자치회를 우선 성립시키고,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찾아내어 대책을 마련하는 공론장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수백 명 주민이 모여서 주민자치회 총회 또는 ‘주민 원탁회의’를 열어 지역에서 정말로 중요한 의제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곳들도 있다. 그렇게 주민이 모여 결정한 중요 과제를 해결할 전략을 구체화하는 노력도 진행된다. ‘마을계획’ 혹은 ‘○○읍·면 발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지역문제를 왜, 누가, 어떻게 해서 해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주민들이 직접 마련한다.

이렇게 작은 지역사회에서 주민이 참여해 수립하는 계획은 지역사회의 의제를 명확하게 그리고 사전에 형성해 두는 수단이 된다. 국고보조 사업이 추진될 때, 대개는 해당 정책 사업이 제안하는 주제에 맞추어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되고 나서야 논의가 시작되기 때문에 주민의 정책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폐단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민 원탁회의 같은 방식으로 의제를 도출하거나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 자체가 지역사회의 발전 역량을 축적하는 학습 과정이 된다.

농촌 시·군 수준에서도 농업회의소 같은 논의 기구를 만들어 지역의 농민들이 지방자치단체에 합리적인 정책을 제안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일방적인 농정을 견제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특히,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농업회의소 법’ 제정 논의가 활발하다. 각종 보조사업 위주로 펼쳐지는 농정 영역에서 보조금을 받으려는 농민은 수혜자이고 객체일 뿐이다. 어떤 명목으로 보조금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은 아무래도 관청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보조금 앞에 농민 줄세우기’라는 방식으로 관(官)이 민(民)을 통제하거나,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세금의 용처를 결정하는 일, 또는 ‘갑질 행정’이 일상다반사다.

그렇게 관 주도의 의사결정 구조 아래에서 농민에게 실익이 없거나 지역농업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시책들이 마구잡이로 펼쳐지는 게 현실이다. 여기에 브레이크를 걸고 새 길을 내자는 것이 농업회의소 설립 운동이다.

한편, ‘마을만들기’나 ‘사회적 경제’라는 이름의 실천에서도 민관협력 구조에 대한 갈증이 상당하다. 상당수의 농촌 기초 지방자치단체들에서 ‘마을만들기 지원센터’나 ‘사회적 경제 지원센터’라는 식으로, 이른바 중간지원조직이 설치·운영되고 있다.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점은, 그 같은 중간지원조직이 수행하는 사업 기능이 아니다. 중간지원조직을 배후에서 지지하고 힘을 보태는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민간부문이, 즉 주민이 시청이나 군청과 대등한 동반자 관계를 이루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즉, 중간지원조직이 그저 ‘행정의 수족(手足)’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주민과 지방자치단체 사이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통로이자 주민 활동의 조력자로서 기능해야 한다.

우리는 이처럼 민-관의 대등한 동반자 관계를 지향하는 운동들이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과 경로를 고민해야 할 때다. ‘민관협력의 구조’를 형성하려는 낮은 풀뿌리 실천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아직 없는 것을 위하여 지금 있는 것과 싸우는 사람, 당연의 모욕을 받으며 세계의 낯짝에 신생의 무엇을 그리는 사람”(최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중에서)이 걷는 길은 항시 힘들겠지만 외롭지는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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