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춘천두레생협 이사

[한국농어민신문]

소비자 협동을 대원칙으로 삼고
생명에 대한 감수성 공유가
생협이 소비자조직 이상인 이유

오랫동안 생협에 몸담고 있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줄임말이 생협이지만, 한동안은 그저 유기농매장으로만 인식되던 때가 있었다. 소비자들의 자주적 협동조직임을 설명하고 강조하느라 애먹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처에 다양한 협동조합이 존재하기 때문에 훨씬 수월해졌다.

생협은 독특하다. 3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사업구조와 외형이 더 세련되어지고 더 커졌기에 독특하다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시대에 역으로 성장을 하고 있어서 독특하다는 것도 아니다. 물론 외적으로 본다면 독특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진정한 독특함은 내적인 면모다. 한국의 생협이 공유하고 있는 2가지 정신이 독특하다.

직접 협동조합에 참여해본 사람들이라면 인정할 것이다. 서로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끼리의 협동조차 실로 어려운 일 아니던가? 원론적으로 본다면, 이해관계가 다른 존재들의 협동조직이라는 것은 별로 권장할만한 일이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협은 이질성을 동질성 속에 녹아내려 노력한다.

생협은 농민과 함께 출발했고 함께 걷고 있는 소비자조직이다. 생협은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 농민(생산자)과 도시민(소비자)이라는 대립적 경제주체들 사이의 협동을 대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질적인 주체들 사이의 위기와 긴장이야 당연하지만, 생협은 협동이라는 내적 동질성의 원리를 견지하고 있다. 일시적인 슬로건이나 마케팅 기법 따위가 아니다. 생협 스스로 존재 이유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 생협에게 농민과 소비자의 협동은 지속적인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첫 번째 독특함이다.

물론 잘 알고 있다. 농민과 소비자 사이의 협동이라는 정신과 문화를 생협의 독특함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실제적 사업에서도 진정으로 그러한지는 충분히 의심해봐야 한다. 나 또한 의심도 많고 문제제기도 많이 하는 편이지만, 그 어떤 시각과 평가에도 불구하고 생협은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한국사회 그리고 농업부문이 생협의 내공과 진보와 성취를 저평가하는 편이지 싶다.

양극화되어가는 농촌사회는 이런저런 협동의 시도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이를 절감한다면 생협이 유지하고 있는 협동의 기조를 평가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 한편으로 가슴 아프다. 생협이 성장해온 30여년의 시간은 농업농촌은 한없이 위축되고 몰락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런 판국이니 생협은 스스로 평가받는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경향성이 있다. 부족함을 안다는 자체가 농민과 소비자들의 협동적 관계성이 생협 내부에 작동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화자찬 일색인 농협과 비교된다고나 할까.

생협의 두 번째 독특함은 무엇인가? 그건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대립적 경제주체들의 협동이라는 첫 번째 독특함이 저평가받고 있다고 했는데, 두 번째 독특함은 아예 평가조차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할만한 장르가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와 자료로 규정하기는 어렵더라도 실체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 독특함이야말로 생협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시대정신이었다.

지금은 사업적인 면에서 마트나 공공급식의 친환경농산물 수급 비중이 크다. 그러나 생협이 친환경농업·유기농업을 품고 발전시켜온 역할과 공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선구적 노력의 바탕에는 무엇이 깔려있었던가? 그것은 생명을 아끼고 생명을 보살피며 생명을 살리는 근본적인 생명 감수성이었다. 농사와 먹거리가 밥상으로 집약되는 과정에 서려있는 생명 감수성을 공유하고 공감한다는 것. 절대로 가치측정이 될 수 없는 이것이야말로 생협이 소비자조직 이상이 되게끔 만드는 독특함이다.

미안하지만 생명 감수성을 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생명 감수성이라는 표현도 내가 억지로 붙인 표현일 뿐이다. 생협은 분명한 사업조직이며 냉정한 시장경제 현실에 기반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農 속의 생명 가치를 발견해내고 품는 조직이기도 하다. 시장가치는 없지만 인간으로서는 무한히 긍정할 수밖에 없는 생명의 가치. 생협은 이것을 붙들고 있음으로 근원과 닿아있고 건강성도 유지된다. 소수 비주류의 감성이므로 독특하다.

춘천두레생협 이사회에는 30대 청년들이 있다. 화천에서 농사짓는 청년, 홍천에서 농산물을 유통하는 청년 그리고 춘천의 사회적경제 활동가 청년 등. 농촌에서 아이 낳고 키우는 일은 농업농촌의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망 그 자체다. 재미있게도 올해 이 세 청년 가정 모두에 둘째 아니면 셋째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소식에 임직원 모두 기쁘고 행복했다. 오늘 생협과 생명 이야기를 잠시 하게끔 만든 즐거운 사건이다.

본디 農과 생명 감수성은 상통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장과 제도가 가로막더라도 생명의 역동성은 그 이상이며 영원하다. 무한의 생명력이 깨어날 봄이 멀지 않았다. 우리의 영혼은 논밭에 밥상에 깃들어 있는 연약한 생명의 힘을 감지한다. 대한민국 農이 회생하는 길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생명과 생명의 먹거리와 생명을 키우는 농민들과 그것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서로 교감하고 긍정하는 것. 그 길이 근본에 닿아있는 옳은 길이란 것은 겨우 안다. 안다고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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