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인 충남마을만들기지원센터장

[한국농어민신문]

지자체 내 연구소 기능 보완하고
수립과정서 당사자 참여 확대
과감한 시도, 추진체계 정비해야


농업, 농촌 관련하여 지자체마다 각종 중장기 종합계획이 넘쳐난다. 법률이 제정될 때마다 하나씩 법정계획이 등장하고, 단체장 공약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계획도 넘쳐난다. 대체로 300쪽 내외의 엄청난 분량과 방대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 보고서 하나 읽자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다. 이런 종합계획이 필요 없다는 문제제기가 아니다. 현실이 복잡한 만큼 현장 실정에 맞도록 종합계획이 제대로 수립되고, 잘 집행되어, 체계적인 변화를 기획해야 한다. 그러자면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은 꼭 필요하다. 

앞으로 자치분권 추세를 고려하면 더 많은 권한이 지방으로 이양될 것이고, 지자체의 계획 수립 의무는 더 늘어날 것이다. 올해 도입된 농촌협약 제도가 대표적이다. 지방분권 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중앙과 지방의 협력적 거버넌스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농촌협약과 연계하여 내년부터 본격 도입될 농촌공간계획 제도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각종 종합계획이 넘쳐나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 명확하다. 하지만 이런 계획들이 지자체에서 효율적으로 작동될지는 여전히 의문이고, 우려스러운 부분이 많다. 몇 가지를 지적해보자.

먼저, 계획수립 ‘과정’ 자체가 시대흐름을 담지 못하고 용역기관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행정은 정책 역량이 미흡하니 과업지시서조차 베끼기 급급하고 전문적이고 방대한 보고서 내용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애당초 쉽지 않다. 지역주민의 참여와 의견수렴도 형식적일 뿐이고, 2, 3년만 지나면 그런 계획이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둘째, 계획서의 구성이나 내용도 현실적이지 못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하다 보니 백화점 식으로 신규 사업이 수십 가지나 나열되어 있다. 전체 구성도 크게 보자면 대부분 현황 분석과 신규 사업 나열에 집중된다.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룬 추진체계 내용은 마지막 부분에 잠깐 언급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제안된 신규 사업의 ‘담당부서’와 ‘예산과목’을 명확히 하려 하면 이때부터 합의 자체가 어렵다.

셋째, 수립된 계획의 집행 상황을 보면 더욱 난감하다. 법정계획이란 것이 대개 3개년, 5개년 계획인데 공무원 순환보직제 문제와 겹쳐 도중에 단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종합계획 성격이라 실제 예산으로 반영되는 사업은 일부분에 그칠 수밖에 없다. 행정의 업무협조체계가 미흡하다 보니 여러 부서에 걸친 융복합 사업은 처음 제안 취지와 달리 변질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넷째, 계획의 평가와 모니터링, 수정 과정은 더더욱 심각하다, 중장기계획일수록 이런 과정이 중요한데, 실제 현장에서는 지자체의 계획 역량이 떨어지니 연구용역을 다시 발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수립된 계획을 꼼꼼하게 모니터링 하는 제도적 장치도 미약하니 결국 ‘책상 서랍 속 계획’에 그치는 결과가 된다. 이 또한 공무원 순환보직제 문제와 겹쳐 전임자 욕하다 끝나고, 중장기계획은 ‘해봤다는 경험’으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의 코로나19 상황과 연계하여 생각해보면 현재와 같은 청사진(블루프린트) 방식의 종합계획은 앞으로 작동하기가 더욱 어렵다. 가축전염병이나 자연재해, 식량파동, 국제무역 갈등 등 예측이 어려운 위기 상황이 수시로 닥칠 것이다. 사전대응이 쉽지 않고 매뉴얼이 작동하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래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란 관점이 중요하다. 갑자기 닥친 위기상황을 빨리 흡수하고 적응하며 회복해나가는 시간과 속도 자체가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민관협치(거버넌스) 역량을 평소에 갖춘 지자체일수록 위기상황을 빨리 돌파할 수 있다. 그만큼 종합계획도 효과적으로 작동된다. 시급한 개선과제로 몇 가지 대안을 제안해본다.

첫째, 지자체 행정 내부에 각종 중장기 종합계획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연구소 기능을 보완하는 것이다. 자치분권이 강화될수록 지자체는 계획(정책) 역량이 가장 큰 경쟁력이 된다. 이미 만들어진 제도로 보자면 ‘계획’ 직렬(직류) 공무원을 체계적으로 채용하고 양성하는 것, 특정 직위에 대해 공무원 대상의 공모제를 확대하는 것, 3년간은 한 업무에서 안정되게 근무하도록 전문직위제를 확대하는 것, 민간전문가를 임기제공무원으로 채용하는 것 등이 있다. 어느 것이나 공무원 순환보직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해당한다. 연구용역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여기에 투자한다면 지자체의 계획 역량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둘째, 계획 수립과정에 지역 내 당사자의 참여를 확대하고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민간 스스로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경험도 매우 중요하다. 매년 농식품부 예산만으로 연간 6~7백억 규모의 역량강화사업이 시행중에 있다고 추정된다. 행정리 단위의 마을계획, 주민자치회를 통한 읍면 발전계획, 시군 단위의 법정계획 등 다양한 계획 수립 과정에 당사자 주민이 주도하거나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스스로 제안한 사업이 반영되는 경험이 많을수록 주민의 보람도 계획 역량도 높아진다. 참여 욕구는 더욱 강화된다.

셋째, 기술적으로도 여러 가지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하는 것이다. 종합계획 담당공무원 실명제와 행정 홈페이지 의무 공개. 각종 계획서를 읽고 토론하는 독서모임과 독서대회 개최 장려, 보고서 요약본을 주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시각적 자료(동영상이나 만화책, 카드뉴스 등)로 전환시키는 민간 보조사업 도입 등이다. 용역비의 10% 정도만 이런 방법에 투자하면 현재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질적 수준도 크게 높아질 수 있다. 적어도 행정 공무원과 용역기관, 의회, 주민 등 이해관계자 사이의 견제와 균형은 확보될 것이다.

넷째, 내년부터 본격 시행될 농촌협약 시대를 대비하자면 ‘지자체의 민관협치형 정책 추진체계 정비’가 시급하다. 선진 지자체 경험을 보자면, 행정의 총괄조정을 담당할 농정기획단 설치·운영, 민간이 적극 참여하는 사업신청서 작성, 농정 분야 통합형 중간지원조직 설치·운영, 거버넌스 강화를 위한 심화연수 프로그램 운영, 농정 분야 통합형 기본조례 제정, 민간 네트워크 법인 설립 지원 등이 중요하다. 

결국 민관협치의 시스템 역량을 갖춘 지자체일수록 농촌협약 공모사업의 선정뿐만 아니라 원활한 추진도 기대할 수 있다. 수억 원의 연구용역비도 아깝지 않고, 일자리도 늘어나고 ‘돌아오는 농촌’이 될 수 있다. ‘정책의 실패’도 극복하고 비로소 농촌의 밝은 미래도 꿈꿔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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