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숙

어제까지만 해도 안쓰럽던 모가 오늘은 안정되어간다. 자리를 잡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하긴 좁디좁은 모종판 안에서 오밀조밀 키 바라기만 하던 어린 싹이 노곤한 날씨에 하릴없이 졸다가 찰칵찰칵 진흙 바닥으로 꽂혀나갈 때 서로가 손을 잡으려 애써도 잡히지 않는 간격으로 탁탁 밀어내던 기계 모내기. 정신 차릴 새 없이 끌려온 아기 모는 비몽사몽 헤매고 어쩌면 밤으론 비비 틀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오기가 있기 마련인가보다. 사각으로 잘려나간 아픔을 진흙 속에 눌러 감추고 절대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여주려 함인가?

꼿꼿한 기백으로 하늘을 향해 서는 어린 모. 아직은 흙탕물이 덜 가신 논이지만 노랑에서 연초록색 옷으로 갈아입으며 열중쉬어, 차려, 앞으로 나란히 정렬하는 모습이 참으로 기특해 보인다.

어떤 예술작품이 이처럼 감동을 줄 수 있었을까? 보고 또 봐도 다시 보고 싶은 모습이다. 모를 논에 심으면 그때부터 벼라고 부른다. 모에서 벼 사이는 겨우 하루 간이지만 하루 빛을 쐰 아기 벼는 제 힘을 다해 일어서려 애쓰고 있으니 오뉴월 하루 빛은 참으로 지대한 은총이다.

오빠와 사촌오빠는 한동갑이다. 학교도 같이 다녔고 노는데도 같이 다니고 하다못해 군대도 같이 입대하는 등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면서도 늘 티격태격하는 말이 ‘오뉴월 하루 빛’ 이란 농담이다.

둘은 같은 달 출생이다. 오빠의 생일은 오월 스무날이고 사촌오빠는 열사흘이다. 그래서 사촌오빠가 오뉴월 하루 빛을 자주 쓰는 편이고 그 레퍼토리에 아직도 묵묵하기만 한 친오빠 모습에서 말의 원조가 바로 모에서 벼의 과정을 일컫는 것이란 걸 충분히 실감하고 웃는다.

모를 가득 안고 있는 논으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스하다. 얼마 전에 불던 메마른 황사 바람 몰아내고 넓고 둥글게 퍼지는 햇살을 보니 오늘보다는 또 내일의 풍경은 연초록을 벗어나 초록이 되리라 기대해본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참으로 좋은 시절, 상큼한 공기를 마주하고 서있는 지금 마음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W.T.O니 F.T.A니 하는 세계화바람과는 상관없이 농부는 때를 어기지 않고 모를 심고 하루 빛에 제 스스로 살아내려는 어린 벼의 몸부림이 대견하고 마냥 고마워서다.

“동생 뭐 해?”

생각에 취해 있는데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뜻밖에도 사촌오빠다.
논두렁을 걸어오는 오빠의 손에는 음료수가 들려있었다. 물렁한 논두렁에 구두 버릴까 아슬아슬하다. 그런데 별안간 얼굴이 홧홧해져 오는 게 내 꼴을 돌아볼 새 없다는 거? 아니지 오뉴월 하루 빛 소리로 예전 흉봤다고 꿀밤을 때리면 맞아야 될 판이 됐다.
 

 

이길숙
이원농장, 이원농장펜션 운영
(사)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제4, 5대 회장 역임
수필집 ‘이원농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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