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안

가을 초입이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한낮에는 햇볕이 쨍쨍하다. 수수·들깨·콩 등의 밭곡식은 가을볕이 좋아 얼씨구나 익어가고, 너른 들녘에는 또록또록 나락 영그는 소리 분주하다. 대풍 예감이다.

정직한 농부를 하늘이 돕고 땅이 도와 이룬 기쁨. 그러나 반쪽 기쁨이라는 것이 농사꾼을 우울하게 한다. 현상 유지는커녕 자꾸만 떨어지는 쌀값에 육신도 마음도 맥이 빠지는 것이다.

이런 농사꾼에게 더 아픈 소식이 들린다. 병상의 백남기 님이 기어이 운명하셨다는 소식이다. 국가의 공권력에 쓰러진 지 316일 만이다. 임은 대통령의 공약인 쌀 한 가마니에 21만 원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다가 경찰의 살수차 직사포에 맞아 쓰러졌었다.

그런데 경찰이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망자를 부검하겠다고 나섰다. 임은 경찰의 살수차 직사포를 맞아 쓰러졌고, 어언 일 년을 사경을 헤매다 운명하셨거늘, 그 영상을 본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인을 경찰만 모른다니. 사과는 못 할망정 가족들이 반대하는 부검을 하겠다고 우기다니. 이는 억울한 죽음 앞에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망나니 같은 짓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사회에 정의가 아직 살아 있다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오늘의 안타까운 소식은 세월 저 너머에서 또 한 사람의 다른 백남기 님을 불러낸다.

13년 전 멕시코 칸쿤, 이경해 열사는 WTO의 본질을 폭로하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했다. <자유무역을 통한 인류번영>이라는 가면을 쓰고 전 세계 가족농과 중·소농의 삶을 핍박해온 WTO. 한국 등 농산물 수입 개도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세부원칙을 합의하고자 했던 WTO 제5차 각료회의를 열사는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무산시켰다.

두 분의 영정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경해 열사는 미소년의 모습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는 강직함을 불 수 없다. 백남기 열사…. 유신 독재와 군사 쿠데타에 맞서 투쟁했고, 우리 쌀을 지키려다 숨지고 만 백남기 님. 열사로 호칭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임의 영정에서도 민주투사의 강한 이미지는 찾을 수 없다. 거기에는 하회탈의 너그러운 미소로 만사 고개 끄덕이는 순한 농부가 있을 뿐이다.

미소년의 부드러움과 하회탈의 미소를 가진 두 열사, 가정이라는 작은 울타리만 생각했으면 다복하게 살았을 분들이다. 거대자본 앞에 버려지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개인적인 안락함을 포기한 분들. 이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내가 요만큼이라도 안정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닐까.

여느 해보다 태풍 피해 적었고 볕 좋은 가을 초입이건만 나는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든다. 모두가 아는 열사의 사인을 다시 밝히기 위해 부검을 하고, 그리하여 해괴한 결과를 내놓고, 열사를 폭도로 몰아 사건을 와전시키고…. 그리하여 하회탈의 미소가 눈조차도 편히 감지 못하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렵다.
 

 

이수안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편집장, 회장 역임
한국포도회 이사
향기로운포도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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