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옥

[한국농어민신문] 

벼르고 별러 과수원에 도착했다. 나무 사이사이의 풀들이 허리까지 닿고도 남을 정도로 자란 걸 보니 오랜만에 온 걸 실감하겠다. 어디가 고랑인지 둑인지 초록 물결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연초록으로 둘러싸인 산도 싱그러움으로 다가온다. 

아들아이는 아래쪽에서부터 풀을 깎기 시작했다. 윙윙 소리를 내며 기계가 지나가자 수북하게 자란 풀들이 잘려 쓰러진다. 풀숲으로 덮였던 밭고랑이 잘 다듬어진 밭으로 탈바꿈한다. 나무들도 풀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숨을 쉬는 거 같아 보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들이 기계를 몰고 밭둑으로 나오며 한마디 한다. 

“엄마, 오늘은 어린이날인데 오늘 꼭 이 일을 해야 해?” 

그도 그럴 것이 어린이날은 공휴일이라 학교도 직장인들도 쉬는 날이다.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이 며칠 전부터 바쁜 일손을 돕겠다며 과수원 밭에 풀을 깎겠노라고 약속을 한 날이기도 하다. 어미 도와주겠노라 큰소리는 쳤지만 막상 해 보니 일이 좀 버거웠던 걸까. 아니면 휴일에 일하려니 살짝 꾀가 나는 걸까. 

아들아이의 모습을 보며 유년 시절의 나를 생각한다. 그때도 어린이날이었지 싶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 부모님은 이른 아침부터 자식들을 흔들어 깨우셨다. 삽 호미를 챙긴 아버지는 고추 모종을 하기 위해 서둘러 밭으로 가신다. 우리 6남매도 따라나선다. 이쪽에서는 땅에 심을 고추모를 나르고, 저쪽에서는 도랑에서 고무바가지로 물을 퍼 나르고, 또 한쪽에서는 물조리로 고추모마다 물을 준다.

형제들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나는 고랑에 앉아 허공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친구들은 어린이날이라고 부모님한테 선물도 받고 맛있는 음식도 먹는데, 나는 왜 일을 해야 할까. 먼 들을 바라보며 울상이 되곤 했다. 온 식구가 거들어도 일손이 부족했던 그때는 왜 그렇게 이날이 싫은지 나는 마음속으로 늘 비가 내려주기만을 기도했었다. 비가 많이 내린다면 고추심기를 안 해도 될 터이니 말이다. 

그때는 변변한 농기계도 없던 시절이었다. 모든 작업을 사람의 노동력으로 해결하던 시절이었으니 아버지는 조무래기들 손이라도 빌려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어려웠을 시대다. 농사가 아니면 다른 어떤 수입도 없고 땅에서 나온 먹거리가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벼르고 별러 날 잡아 고추모종을 하는데 게으름을 피는 나를 보고 부모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이제는 세월이 많이 좋아졌다. 옛날처럼 도랑에서 물을 퍼 올리지 않아도 되고 호수로 연결만 하면 물이 나온다. 농기구도 자동화돼 기계 위에 앉아 스위치만 눌러도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다. 또한 전지할 때도 손아귀의 힘으로 나뭇가지를 자르지 않고 기계가 스윽 힘도 들이지 않고 잘라준다. 그만큼 일이 줄어든 셈이다. 오늘 하루 일손을 놓는다고 농사에 큰 지장은 없을 터이다.  

오늘도 방송에서는 관광지가 북적이고 고속도로가 꽉 막혀 혼잡하다고 했다. 이걸 보면 어른들도 이날을 기다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어른이날이라고도 하나 보다. 오늘은 우리도 어른이날 기념으로 온 가족이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와야겠다. 하던 일 잠시 멈추고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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