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선

[한국농어민신문]

들에 나가니 어느새 꽃다지가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옆에 어느 아낙이 캐다가 흘리고 간 냉이에서도 꽃이 피었다. 옆집 밭을 보니 움파도 파랗게 올라오고 있었다. 마른 가지에서 새싹이 피어나는 느낌은 설렘이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자연은 때가 되면 우리 곁으로 슬며시 다가와 있다. 아직은 한가한 이 넓은 대지도 곧 농부들의 발자국으로 분주해질 게다. 이 논에서 저 밭에서 트랙터 소리와 동네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로 봄은 정신 차릴 시간 없이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이렇게 생동하는 봄이지만 흐뭇하고 행복해하는 농부가 많지 않은 것 같아 마음 아프다.

신문을 넘기다 보니 ‘고향세’라는 대목에 눈길이 갔다. 세금을 내다내다 별 세금을 낸다고 중얼거리며 읽어보니 뜻밖의 내용이다. 본인의 고향이나 원하는 지자체에 일정한 금액을 기부하는 게 고향세라는 것이다. 일정한 세금도 면제해 준다고 하니 고향의 농민도 위하고 본인에게도 해가 없는 괜찮은 제도였다. 곧 시행될 거라는 반가운 기사였다.

농민들의 행복지수가 해마다 줄어든다고 한다. 고생의 대가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조금 젊다 싶으면 보따리를 싸서 농촌을 떠난다. 간혹 귀농하는 사람들도 퇴직 후 조용한 곳으로 휴양차 찾아온 이방인이 대부분이다. 농민이 행복한 나라가 진정 잘사는 나라라는 말을 신문 한 귀퉁이서 읽은 기억이 난다. 나를 보나 이웃을 보나 그냥 직업이니까 봄이 오면 씨 뿌리고 가꾸고 가을이 되면 수확을 한다. 행복하게 농사를 짓는 사람은 드물다.

극히 드문 사람 중의 한 사람을 난 알고 있다. 친정 당숙 어른이다. 겨울에도 얼어붙은 땅이 녹기만 기다리는 사람. 얼른 봄이 와야 일을 한다며 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 군대 간 아들 봄이 오면 제대한다는 기별 받은 것처럼 봄을 기다린다.

이제 일을 줄이고 쉬어도 좋은 연세가 되었다. 겨울에는 농사를 반으로 줄여야지 하고, 봄이 오면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 인삼밭으로 갔는가 하면 수박밭으로 가있고, 저녁이 되어 집에 쉬려고 들어갔나 하면 축사에서 소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시간을 쪼개어 하루를 완성하는 사람이다. 동네 이장도 오래 보셨다. 어쩌다 친정 가서 늦잠을 자고 싶어도 새벽 동이 트기 무섭게 동네 방송을 하여 잠을 홀딱 깨워 놓던 분이다. 부지런함을 이야기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당숙 어른이다.

농부는 농사지을 때가 가장 좋은 거라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하면 듣는 사람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흰 머리카락을 흙 묻은 손등으로 쓸어 올리며 인사를 받는 모습은 젊은이 못지않게 힘이 있어 보인다. 참 농부인 당숙 어른을 만나면 여름날 나무 그늘에 앉아 시원한 수박 한 점을 베어 먹는 느낌이다.

우리가 이렇게 찰지고 기름기 흐르는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그리 역사가 길지 않다. 우리는 통일벼 세대이지만 부모님 세대들은 아니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고 쥐면 모두 흩어지는 안남미를 기억하는 세대가 아직은 우리 곁에 많다. 베트남 여행을 갔을 때 밥이 입안에서 각자 놀아 씹기도 불편한 안남미를 경험한 사람이 많을 게다. 그런 밥도 배불리 못 먹어 침을 흘리던 시절이 있었다. 보리쌀이 대부분인 밥그릇에 간혹 보이는 안남미, 그도 참 반가운 쌀알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저 배부르게만 먹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 배만 부르면 부러울 것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 지금처럼 고기반찬에 찰진 밥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보릿고개를 격은 분들은 감사하는 마음과 행복지수를 같은 선상에 둔다. 배불리 먹을 수 있음이 축복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좀 젊다고 느끼는 세대들은 감사와 행복지수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같이 어정쩡한 세대의 사람들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늘 감사와 행복을 함께 둔다. 농부의 딸이었고 농부의 아내인 덕분이다.

복숭아꽃이 활짝 핀 과수원에서, 빨간 고추가 주렁주렁 달린 밭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을 바라보며 농부의 한숨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설렘만큼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 어느 날 수확을 마치고 열어 본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며, 흐뭇하게 웃는 농부가 많았으면 좋겠다. 너도나도 고향세를 내겠다는 신청자가 많아서 처리가 늦어진다는 뉴스를 빨리 듣고 싶다.

/이재선 농민문학 신인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음성문인협회 분과장,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사무국장, 농민문학회 회원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